창녕 성부자집
창녕 성부자집 아석헌(我石軒)을 찾아가다. 지난해 고향길에 찾았을때는 아석헌이 문을 닫아놓아서 내부를 둘러 보지 못하고 담장 밖에서 만 둘러 보면서 그림을 담았었는데 이번 방문길에는 다행이 내부를 볼 기회가 있었다. 또 어린 학창시절에는 이 길을 오가며 이 고가를 보기는 하였으나 깊이있는 이 집에대한 역사는 알수가 없었으나 차츰 세월이 흐르면서 고향길 에 이집에 얽힌 이야기도 들을수가 있었고 근래에는 성기학 회장님이 이 아석헌을 인수관리 하여 어느정도 개방하기에 오늘은 고향 선영 다녀오는 길에 들렸드니 다행히도 관리인이 있어 내부를 둘러 볼수가 있어 사진을 담았고, 방문길에 만난 창녕군청의 문화재 해설사의 설명과 여러 자료를 합쳐서 기록해 본다. 곧이 알겠지나는 이 아석헌은 창녕읍에서 대지면을 지나 이방면으로가는 지방도 에 접해 있으며 대지면을 지나면 바로 석리에 있는 고가이다. 창년읍과 우포늪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있다. 참고로 아석헌은 강릉의 선교장 과 구레 운조루 와 더부러 우리나라 삼대명택중의 하나이다. 창녕의 아석헌은 일명 "창녕성부자집"으로도 불리우며 집뒤의 동산에는 대나무숲이 우거져 지금 이라도 지네가 꿈틀그리며 나올 형상이고, 앞에는 화기가 충만한 화왕산을 마주하고 있으며, 앞으로 전게되는 수백만평의 농지는 일명 "어물리 뜰"이라하여 이지방의 풍요의 들이며 지금은 우리나라 양파의 주산지이며 서쪽으로는 람사르 협약에 의해 관리 되고있는유명한 우포느피 자리하고 있다. 아석헌 정대문은 닫혀 있어 동쪽 대문을 통해 관리인의 안내로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아석헌으로 들어가는 쪽문이다. 이 문을 통해 들어가면 아석헌이 이다. 이 아석헌은 이곳에 자리한 서른채의元宅이다. 참고로 이집을 관리하고 있는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이 자기의 고조부이신 성규호(成圭鎬)선생이1885년 노모를 모시고 이곳에 와서 터를 딱고 지은집이며, 그 이후 분가한 손자들이 집을 잇대 지어면서 4개 동 30채 규모의 한옥촌이 생겼다고 한다. 이 아석헌에 이어 지은집이 1860년데 에 석운재(石雲齋) 이고 1920 년대에는 경근당(慶勤當)이며, 1930년 대에는 일신당(日新堂)을 지엇다고한다.
아석헌 고택들은 지은 시기에 다라서 각기 다른 양식을 보여 주며, 우리나라 전국의 유명한 고택들이 시간을 붙잡은채 그 시대만 얘기하고 있는것과는 다른모습이다. 고택에 얽힌 사연도 많아 석운재는 1863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퍠하자 아석선생이 관산서원의 안채를 그대로 옮겨다 지었다고 한다. 비교적 늦게지은 겨근당 안채 마루는 사방에 유리문을 달았고 실내 목욕탕 까지 갖춰져 당시의 서양건축의 편리함을 도입 한것같고, 집 사이의 담장도 전통담장과 달리 낮게 한것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집안 어른들이 꾸민것 이라한다. 지금 이 아석헌은 성기학 회장의 조부모가 기거하며 과객을 맞이 했다는 일신당 마루도 유리로 4면을 장식 하였으며 우리나라 격동기의 계몽주의로 통하던 아석의 문중에도 영향이 미친것 이라고한다. 또한 해방의격동기 성회장의 당숙인 성유경(1982년작고) 이 남로당 활동을하다 한국전쟁 직전인 1948년 가족을 데리고 월북하였는데 그의 딸이 김정일의 부인이자 감정남의 모친인 성혜림(2002년 모스코바에서 사망)이다. 한때 성혜림의 생가란 소문이 나면서 아석 의 고택이 주목받기도 하였으나 사실과 다르다고한다. 이아석 고택은 한국전쟁때 미 24사단 본부 지휘부로 쓰였으며 북한군에 밀려 후퇴할때 서류를 태우다고 가면서 절반정도가 불에 탔고 일신다 기둥에 는 손도끼 투척을한 흔적이 남아있기도 하다. 아마 이는 북한군이 들어와 그랬지않나 추정되기도 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1863년 병자년 흉년때 아석선생은 땅을 팔아 굶주린 인근 의 빈농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고, 성기학 회장의 부친 우석 성재경(愚石 成在慶 1916 ~ 1981)선생은 서울에서 출판사를하다 1.4후퇴때 낙향하여 주민 교육과 농가소득을 올리는 데 힘 썼으며, 당시 지역 농민들이 너무 가난하여 보리농사를 하며 연명을 할때 일본에서 양파 씨앗을 가져와 선진 농경법을 도입해 지역농민들이 삶을 도았다고한다. 이것이 창녕양파 주산지가된 동기 이라고한다. 정문 왼쪽은 정원으로 구성 되어있다 아석헌은 정문으로 들오면 바로 나타나는 솟을대문이 나오는데 지금은 정문이 닫혀 있어 동문으로 들어와 둘러 본 그림이다. - 구연정 별당의 반도지 - 아석헌의 서편에 있으며 이 반도지는 흡사 한반도의 형태로 만들어 져 있다. 뒷 동산의 대나무 숲 마침 내가 찾았을애 창원에서 왔다는 어느경노당 회원들이 창녕군홍보과 직원의 도움으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석헌의 정문이다 아석헌의 전경 아석헌 고택은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이 1998년 부터 복원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당시 몸이 불편하셨던 모친이 창녕의 옛집에 가기를원해 내려 왔는데, 그데로 두면 건물들이 무너지기 직전 상태였는데 아석헌, 경근당, 일신당등의 집은 보강하고, 불타없어진 집은 해체되기 직전에 자제를 정리하여 복원하였으나 완벽하게 할수는 없었다고한다. 복원된 한옥은 지역민들의교육장소로 이용되기도 하고 뜻있는분들의 쎄미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참고자료 ; 구산의 월간 수석 의미 blog) 감사 합니다. 촬 영 ; 2013. 12. 8. 글 / 편집 ;푸룬솔 짱 |